사회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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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 10년, '위험의 외주화' 끝났나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 한편에는 10년 전 열아홉 청년의 꿈이 멈춰 선 자리가 있다. 2016년 5월 28일, 스크린도어 수리 신고를 받고 홀로 현장에 투입됐던 김군은 열차를 피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고 당시 그의 가방에서 발견된 것은 고장 난 문을 고칠 연장들과 차마 뜯지 못한 컵라면 하나였다. 끼니조차 챙길 여유 없이 '1시간 이내 출동'이라는 가혹한 속도 경쟁에 내몰렸던 청년의 유품은 효율과 비용만을 앞세웠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전 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력 부족을 방치한 채 하청업체에 위험한 업무를 떠넘긴 구조적 모순에 있었다. 서울메트로와 용역업체 사이의 계약에는 지연 배상금 규정이 존재했고,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2인 1조'라는 안전 수칙보다 '신속한 처리'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사고 직후 사측은 노동자 개인의 과실로 책임을 돌리려 했으나, 법원은 위험을 외주화하고 감독을 소홀히 한 원청의 책임을 명확히 판시했다. 이 판결은 이후 노동 현장의 안전 관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드는 법적·사회적 근거가 되었다.

 


김군이 떠난 자리에는 수많은 시민의 추모 메시지가 포스트잇이 되어 붙었고, 그가 먹지 못한 컵라면은 해마다 기일이면 승강장 앞에 놓였다. 기관사를 꿈꾸며 성실히 일했던 청년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켜주지 못한 미래 세대에 대한 부채감으로 남았다. 시민들은 "그곳에선 컵라면 말고 고기를 먹으라"는 애절한 글귀로 고인을 기렸으며, 이는 노동 현장의 안전이 곧 생명권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이끄는 도화선이 되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9-4 승강장은 여전히 성찰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구의역 사고 이후에도 일터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또 다른 김군'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 평택항의 이선호 등 수많은 청년 노동자가 비슷한 구조적 결함 속에서 스러져 갔다.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고 생명안전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등 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었으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 안전 수칙을 압도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숙제로 남아 있다.

 


참사 10주기를 맞은 2026년 5월 29일, 김군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억식이 구의역 현장에서 열렸다. 10년 전 사고가 발생했던 그 시각, 승강장에는 적막을 깨는 열차 진입 소리와 함께 고인의 이름을 부르는 추모객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시민들은 컵라면 대신 따뜻한 도시락을 놓으며 더 이상 외로운 죽음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슬픔을 무디게 할 법도 하지만, 9-4 승강장을 찾는 발길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 연대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날 행사는 김군을 포함해 산업 현장에서 희생된 모든 노동자를 호명하며 그들의 삶을 기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참석자들은 안전한 노동 환경이 보장될 때까지 감시와 목소리를 멈추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10년 전 청년의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은 이제 단순한 유품을 넘어 노동 존중 사회를 향한 상징이 되었다. 구의역 9-4 승강장의 시계는 10년 전에 멈췄을지 모르지만, 그날의 기억을 품은 우리 사회의 안전을 향한 발걸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남원 옛길 탐방, 춘향의 눈물과 오수개 충절을 걷다

던 주요 통로로, 소설 춘향전 속 이몽룡과 춘향이 이별의 눈물을 쏟았던 ‘오리정’이 그 출발점이다. 고을 경계에서 손님을 배웅하던 오리정 인근에는 춘향의 슬픔이 서린 ‘눈물방죽’과, 떠나는 임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 버선발로 뛰어갔다는 ‘버선밭’ 지명이 전해진다. 비록 도로 확장과 직선화 공사로 인해 옛 풍경은 많이 변했지만, 길가에 홀로 선 표지석들은 이곳이 단순한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역사적 서사의 공간임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오리정을 지나 북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노거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 대말방죽에 닿는다. 이곳은 조선시대 ‘반보기’ 풍습이 행해지던 애틋한 만남의 장소였다. 추석 직후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회포를 풀던 이 숲은, 모녀들의 눈물과 웃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소통의 광장이었다. 현재는 방죽 수면을 마름이 뒤덮고 멸종위기종인 가시연이 힘겹게 싹을 틔우는 한적한 저수지로 변모했으나, 여전히 그 제방과 숲에는 수백 년 전 여인들이 나누었던 따뜻한 온기가 서려 있다.길은 다시 오수천변의 망북정으로 이어진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우뚝 솟은 망북정은 18세기 관리들이 북녘 한양의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며 충절을 다짐하던 곳이다.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망북정’ 암각서는 당시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충의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오수천 건너편은 우리에게 친숙한 ‘오수개 설화’의 실제 발생지로 추정되는 상리 천변이다. 흔히 원동산의 동상으로만 기억되는 오수개의 이야기는 사실 이 차가운 물줄기 옆에서 주인을 구하고 숨진 충직한 짐승의 실화에서 비롯되었다.과거 오수역참은 고을 관아와 맞먹는 규모를 자랑하던 국가 교통의 핵심 요충지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관통하며 천 년의 세월 동안 통신과 운송을 담당했던 이곳에는 이제 한 그루의 은행나무 노거수만이 남아 역사의 부침을 지켜보고 있다. 500년 전 한 선비가 읊었던 시구에는 역 앞에 실재했던 ‘개 묻은 나무(獒樹)’에 대한 기록이 생생히 남아 있어, 설화 속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가 아닌 지역민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힌 역사적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시름과 개의 충절이 한 공간에서 공명하고 있었던 셈이다.탐방의 종착지인 원동산에는 오수개의 넋을 기리는 의견비각과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철교 공사 중 발굴된 의견비는 우여곡절 끝에 이곳으로 옮겨져 3.1 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장터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조형물 주위에 새겨진 부조 속 오수개는 불길 속에서 주인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긴박한 순간을 보여준다. 이는 충의라는 거창한 명분을 넘어, 끝까지 곁을 지키는 존재로서의 다정함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되묻는다.춘향의 이별로 시작해 오수개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이 옛길은 서로 다른 시대의 기억들이 오수천을 사이에 두고 겹쳐지는 거대한 박물관과 같다. 직선화된 국도 옆으로 잊혀가는 지명들과 잡초 무성한 옛터들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오갔던 이 길은 지금도 설화와 풍경, 그리고 오래된 기억을 품은 채 묵묵히 흐르고 있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고, 잊혔던 가치들이 다시 살아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